시인이가을의 詩

[스크랩] 영원한 나의 노스탤지어, 어머니 / 이 가을

시인 이가을 2014. 5. 31. 13:32

영원한 나의 노스탤지어, 어머니 / 이 가을

 

세상에 태어나 독립獨立된 개체個體로서의 나의 삶이 어느덧 오십이다.

오십을 지천명地天命이라 한다지. 공자가 쉰이 되어서는 천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지만, 나는 공자처럼 하늘의 뜻을 알기는커녕, 내 마음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이성적인 생각보다 감정에 끌려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쉽게 노하기도 한다.

이성과 감정을 적절히 조화시켜 지혜롭게 사는 오십 된 삶이라야 하지만, 쉰에 몇 해를 더 보탠다 해도 공자처럼 하늘의 뜻을 알기란 내게는 요원遼遠하기만 할 게다.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는 자기 발견인 동시에 끊임없는 자기 성취, 자아실현의 과정이 되풀이 되는 것이라서, 삶을 살면서 무엇을 더 추구하더라도 나는 완성된 삶을 살았어. 단정 짓기보다는, 어느 정도에서 자족하는 것은 자신과의 타협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마음의 여유뿐 아니라 겸손함의 발로發露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는 전제하에 욕심에는 끝이 없어, 하나를 채우고 나면 다른 것이 보이고 또 다른 욕심으로 발전되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욕심의 항아리는 점점 커져만 가서, 나중에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에 불행해하다가 끝내는 마음이 황폐해 질 것이다.

옛말에 ‘말馬 타면 경마 잡고 싶다는 말言과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네 번 지나고, 다섯 번째를 몇 달 남긴 시점에서 나를 돌아보면 자기성찰의 시간이 부끄럽고 한편으론 괴롭기까지 하여, 읽던 책이라면 그냥 덮어버리고만 싶지만 책임이 따르는 삶이 어디 읽던 책冊처럼 이랴.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았을까 자책 한다 한 들, 앞으로의 삶이 자동차 핸들 틀 듯 이야 못하겠지만, 보이지 않게 나를 지배하는 어떤 힘이나 틀에 얽매여 끌려가기 보다는, 삶의 주체는 내 자신이기에 가족이나 처한 상황을 도피처로 삼아 안주安住한다면, 당장 은 편하리라.

하지만 그 누구라 해도 나를 대신해 살고 죽을 수 없는 것이 극명克明하다.

세월이 더 지난 후 기회를 활용하지 않고 꿈을 포기한다면 자기실현 못 한 것에 대해 스스로 힐책하게 될 것이다.

 

정말 멋져, 훌륭해 이런 칭찬이야 못 듣더라도, 타인에게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않아야 할 여자나이 오십,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나이며 편안해 질 나이, 활활 타는 장작불을 비켜나 잠재되어 이글거리는 불덩이 같은 열정으로 그 무엇에 새로 도전해도 될 나이.

 

오십 앞에 서서 마음을 모아보자. 무엇이 보이고 내게로 향한 외침은 무엇인지 마음의 소리를 들어볼 일이다.

내게로 향한 많은 소리 중 나를 더 잡아끄는 것은 그리움이다, 등 뒤에 있던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 소리쳐 부르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아니 그동안은 들어보려 귀 기울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 함께 한 자리마다 아로새겨진 그리움은 소중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리움 중앙에는 영원한 나의 노스탤지어 어머니가 서 계신다.

문득, 어머니의 오십은 어떤 빛깔로 채색되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작년 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이었다. 모녀가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네가 올해 몇 살이지?” 어머니의 물음에 “엄마 딸 나이? 벌써 마흔 여덟이야” 하니 “에구 많이도 먹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을 스쳐간 그늘을 읽었다.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의 생일, 잊고 그냥 넘길 만한 연세인데도, 해마다 전화로 축하를 해주시던 어머니가, 딸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해 물으신 건 아닐 것이다.

 

철부지였던 딸의 나이와 당신의 나이, 팔십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참 쓸쓸했으리라.

쳇 바퀴 돌 듯 틀에 박힌 삶을 사는 동안, 나를 돌아보고 내 삶의 질을 높이려 재충전의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달릴 수밖에 없었던 질곡의 세월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당신의 존재감은 없다 싶고 오로지 가정이란 테두리 안에는 남편과 자식만 있었을 것이다.

“내 자신의 삶이 뭐가 그리 중요해, 가족을 위해서라면 문제될 것이 없어”라며 남편과 자식의 삶보다 하찮게 생각했던 당신의 존재, 어릴 때부터 각인된 여인의 삶을 살았기에 노년에는 장성한 자식들을 보며 겉으로야 흐뭇해 하셨지만 어디 속까지이랴

 

아버지 돌아가신 후 두어 달이 지나서였다. 어머니와의 전화통화는 주로 오전이었지만 그날은 저녁시간이었고 내 휴대전화에 어머니 번호가 뜨기에 받았더니 짐짓 아닌 체 음성을 가다듬었겠지만 어머니 목소리에는 물기가 번져있었다.

어머니는 한참을 그렇게 그리워하며 아파하고, 무엇으로도 메울 수없는 복받치는 감정을 삭이려 노력하다가, 더는 참는데 한계를 느껴 딸을 떠올리기까지, 거듭 생각한 후 이내 번호를 누르는 시간은 극히 짧았으리라. 그 순간 엄마가 생각했을 딸은 스치는 생각과 감정까지도, 시시콜콜 쏟아놓고 예민하다 싶으면 애교 섞은 혀 짧은 소리로 “사랑해요” 마미 하며 괜한 말을 하기도 하고, 때때로 엄마는 속엣 말도 편하게 했던 가장 만만한 못난이 딸이었음을 잘 안다.

 

엄마도 들었을까?, 아버지가 잠드신 그 숲의 잡목들 사이로 뛰어다니던 초겨울 바람소리를.

저물녘이면 당신의 딸도 그 숲이 떠올라, 서재에 틀어박혀 울다가 그때는 중학생이었던 딸에게 위로를 받으며 몇 달, 그리고 초겨울의 길목에서 몇 년 더 아파했음을.

 

한겨울, 찬 길바닥에서 떨던 땅거미가 벽을 타고 창문으로 기어오르던 시간, 전등 스위치를 넣다가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을 보며 엄마는 마음 속 대화를 하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회한과 슬픔, 그리움과 서러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끝내는 목 놓아 울었다고 털어놓으시며 집에 언제 올래?” 하시던 어머니.

“엄마에게 아버지의 빈자리가 익숙해 질 때까지 한꺼번에 우르르 가는 것 보다는, 매주 돌아가면서 찾아뵙자”는 큰언니의 말에 모두들 그렇게 하던 중이었고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매주 자식들을 만나고, 큰아들 가족들이 함께 살면서 살뜰하게 보살펴 드리며, 배려했어도 엄마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대신하며 채울 수는 없었으리라.

다만 자식들 마음을 잘 알기에 감정이 복받칠 때에도 내색하지 않고 안으로만 삭이셨겠지.

 

엄마의 전부였던 아버지의 빈자리가 차츰 익숙해지고, 다른 것들로 채워지며 아픔이었던 상처에 새 살이 돋을 즈음, 엄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찬송과 기도로 보내며 두 손자에게도 애정을 더 쏟고 신앙 안에서만 살도록 권면하셨다.

어떤 날은 추억의 서랍을 다 쏟아 놓고, 들여다보며 혼잣말도 하고 생각에도 잠겨 있다가, 다시 주섬주섬 추억들을 서랍에 담을 때는, 물기 가득한 채 흔들렸던 눈빛도 차츰 무심한 듯 보였지만, 팔 십 여년의 긴 세월, 온갖 것 다 담아야 했을 어머니의 가슴은 무뎌지고, 자잘한 감정까지 표현할 만큼의 여력이 더는 없었을 것이다. 산 사람은 어찌어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망각의 존재이기에.

익히 알고 있는 어머니의 삶, 그리고 오십 앞에서 어머니가 내게 전하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 귀 기울였다가 끊임없이 나를 흔들어 깨우는 그리움을 만났다.

그 그리움은 바로 영원한 나의 노스탤지어 어머니셨다.

 

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길러지고, 교육받으며 뼈 속까지도 여자인 채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일은, 어찌 보면 고달프기도 하고 무슨 일에서든지 몇 번 더 생각해 봐야 하는 제약이 많으며 매사가 조심스럽기만 한 여인의 삶이다.

내 나이쯤 되면 자랄 때 많이 듣던 말이 있다. “넌 여자아이가 왜 그래?, 여자는 그러면 안 돼, 여자니까, 여자잖아,” 어디에서나 하는 말이고 누구네 집에서나 듣게 되는, 무의식중에 있던 그 말 중 하나를 언젠가 딸아이에게 무심코 했었다. 딸아이는 발끈하며 “그 말이 성차별이며 틀에 가두는 말인 걸 알아요?” 하기에 그 후로 여자이니까 라는 말로 선을 긋지는 않지만, 제 엄마 세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친척이나 주위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딸아이도 예전에 내 감정처럼 여자라는 피해의식이 작용하는지 대놓고는 말하지 않아도 얼굴은 이미 ‘나 불쾌해“라고 씌어있다.

윗세대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굴레라고 이름 짓지도 의식하지도 말고, 가정을 가진 여자로서 충실하면서도 네 삶을 가꾸라는.

남편과 자식이 내 삶의 전부라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던 것에서 조금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의 태중에서 탄생이라는 독립獨立된 개체個體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오십을 준비하며 상념에 잠겨 있던 내게, 어머니의 과거와 현재, 여자로만 키운 딸에게 여자로만 살라 하시더니, 엄마의 딸이 오십이 되니 이제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삶을 살라하신다. 팔십을 바라보며 느꼈을 어머니의 쓸쓸함을, 오십 앞에 선 딸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실 게다.

 

어머니와 딸, 딸과 어머니는 동일시되는 거울이다.

내가 웃으면 거울도 웃고, 내가 찡그리면 거울 속 나도 찡그리는, 닮았으며 같아지는 관계.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삶을 보면서 배우고, 나중에는 답습하게 되는 딸이면서 여자만의 삶,

그래서 엄마를 알려면 딸을 보면 되고, 딸이 어떤지 알고 싶으면 그 엄마를 보면 된다고 했던가. 신중하게 행동할 일이다. 내 행동여하에 따라 나의 어머니와 내 딸까지도 상대는 잣대로 재며 판단할 수 있기에, 위로는 어머니와 아래로는 딸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겠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즐거웠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부끄럼 없이 내보이듯이 나의 오십부터의 삶은 어느 누구의 후광인 삶보다는 내 모습 그대로 보부도 당당히 걷는 삶이었으면 하는 다짐을 해본다. / 2009년 가을호에 발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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