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오두막 편지
오두막 편지 / 이 가을
폭양의 계절, 여름에 묻혀
쉬이 보이지 않아 잊고 살았던
자연 속 미미한 존재들을 만나러 가는 길
사람이 지난 흔적 없는 곳
높게 자란 풀숲을 헤치면
수줍게 피어 있는
키 작은 풀꽃들의 생글거림을 만난다
숲을 뛰어 다니던 바람
꽃향기 데려갔는지
향기 없는 풀꽃에 마음까지 찡하고
이따금 벌과 나비 찾지 않으면
풀숲에 묻혀 그냥 스러지고 말
꽃들이 피어 있는 길을 걸어가다 만난
빈 오두막 한 채
허리 높이 돌담은 반쯤 허물어 지고
긴 세월 방치한 듯 이끼가 제 세상 만났다
돌 틈 사이 애처롭게 핀 꽃은 쓰러질 듯
따가운 햇살에 녹아 버릴 듯 처연하고
마당인지 풀밭인지
이리저리 누워있는 항아리는
주인의 손길 기억이나 하는지 햇살에 반짝거리고
오두막 집, 마당 끄트머리 누렁이 집은
제 키보다 높게 자라난 풀 속에 묻혀
보름달이 떠오른 밤이면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와
바람소리에도 예민했을 개 짖는 소리가
거미줄 뒤집어 쓴 채 잠들어 있다
고개를 숙여야 들고 날 수 있는 붴 문짝의 쇠잔함과
황토벽 등잔불의 그을림 벽화에도 세월이 쌓였다
바짝 마른 장작 한 무더기와 나뭇단은
갈퀴 같은 손으로 하나, 둘 모았을 테지
많은 얘깃거리 텃밭 고랑마다 심어놓고
고추나 가지, 쪽파 열무를 가꾸며
찬거리 삼았을 오두막집 할머니
어린 배추 솎으며 노랗게 속이 들어찰
김장배추 생각에
무료한 한낮 배추벌레 잡으며 소일했을 할머니
가을의 향기와 소리가
무릎걸음으로 오며 그림자 길게 눕는 시간
언덕배기 수풀들은 우거지고 풀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을
할머니의 흔적을 찾으려 더운 발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왔으면.
오두막을 스치고 지날 그 무형의 바람 속에
할머니의 생을 더듬거려 보면
뜨거운 바람은 그저 불어오던 무심한 바람은 아니었을 게야
할머니와 동무되어 소곤소곤 얘기도 나누고
한 줌 되지도 않는 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가끔은 혼잣소리로 바람까지도 이렇게 더울까
할머니 음성 들리는 듯
저 이름 없는 풀꽃들 까지 키우며
열매 맺게 할 이유 있는 바람이었겠지
쉬이 잠들지 못하던 기-인 밤
덜컹 덜컹 문짝 흔들던 바람에게도
살가운 마음에 문 한 번 열었다 닫고
그 사이 냉큼 들어온 바람 붙들고
외로운 속내를 풀어 놓으셨을 거야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만큼 무섭고 긴 겨울밤
그리움 된 눈雪 쌓이는 소리
빈 가지 바람 지나는 소리
문풍지 떨리는 소리까지
마음 밭에 앉혀 놓고 겨울 친구했으리라
윗목 낡은 시루에 묻어 놓은 움파가 노란 속 대궁을 내밀면
그 놈 참 예쁘다 하시며 손자를 떠올리고
더디게 오는 새벽을 끌어당기며
눈가가 짓무르도록 그리움에 젖었을 거야
밤새 꽁꽁 언 바람이 성성거리면 바람과 얘기하며
마당가를 서성거리셨을 할머니를 그려보며
낡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2004.8.29
*붴= 부엌의 옛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