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여름꽃] 테마로 읽는 현대시 - 이기철의 「도라지꽃처럼」
여름꽃
테마로 읽는 현대시
이기철의 「도라지꽃처럼」
무슨 사닥다리 놓아 너의 눈물 끝의
푸른 강에 닿을 수 있으랴
금 간 돌 위에 꽃 한 송이 피고
봄에서 가을까지 트이지 않는 길 위로
강물보다 낮은 소리로
비비새는 울면서 제 길을 갔다
제 슬픔에 져내리는 꽃잎의 무게에도
이제 옷섶이 무거워지는날들이 온다
밤새 가슴을 쥐어뜯던 말 한 마디를
부끄럽게 너의 섬돌 위에 올려놓으려
도라지꽃처럼 파랗게 멍든 새벽길 간다
달빛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한올
부질없는 말 한 마디로 엮어
너에게 띄우며
-<시사사, 7-8, 2012>
도리지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꽃말이 보여주듯 도라지꽃은 애처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도라지라는 이름의 처녀가 돈을 벌기 위해 먼 길을 떠난 오빠를 기다리다 죽은 언덕에 핀 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또 도라지라는 이름의 처녀가 상사병에 걸려 죽은 뒤 무덤가에 꽃으로 환생하여 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애틋한 도라지꽃 이야기는 이기철의 시「도라지꽃처럼」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도라지꽃처럼」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그리움을 한 폭 수채화처럼 펼쳐놓고 있다. 그리움은 그 어떤 경계가 있을지라도 넘나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득하고도 아득하여 그리움이라는 "사닥다리"로도 가 닿을 수 없는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그 애틋한 이야기는 전설이 된다. 왜에 인질로 잡혀간 눌지왕의 아우 미사혼을 구하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신라 충신 박제상의 아내 이야기를 담은 망부석 전설이 그렇고, 금강산 깊은 골에 오누이가 살았는데, 아픈 누나를 위해 말로만 듣던 만병통치의 약초를 캐러 나가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찾아 초롱불을 들고 길을 나섰다가 병세가 도져 그만 죽고 만 누이의 이야기를 담은 금강초롱꽃 전설이 그렇다. 하여 시인은 "무슨 사닥다리 놓아 너의 눈물 끝의/푸른 강에 닿을 수 있"겟느냐고 탄식하지만, 그 기나긴 세월을 견딘 그리움은 "금 간 돌 위에 꽃 한 송이"를 피운다.
이러한 인식의 깊이는 자칫 가벼워질 수 있는 그리움이라는 주제의 한계성을 극복하는 장치로 가능할 뿐 아니라 재생의 생생력生生力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 "금 간 돌"과 "꽃 한 송이'의 결합은 동양적 인식의 결과이지만 옥타비오파스가 말한 "단어들도 서로 사랑한다"는 통찰력, 그 심연의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기철 시인은 이제 "제 슬픔에 져 내리는 꽃잎의 무게에도/이제 옷섶이 무거워지는 날들"을 온몸으로느끼는 연륜의 시간 속에 서 있다. 하여 이제 그는 "도라지꽃처럼 파랗게 멍든 새벽길"을 걷는다. "밤새 가슴을 쥐어뜯던 말 한 마디를/부끄럽게 너의 섬돌 위에 올려놓으려"고 가는 길이다. 그 길에는 "달빛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새겨져 있다.
이기철 시인은 1972년 「오월에 들른 고향」이 『현대문학』에 추천돼 등단한 이후 자연과 인생에 대한 관조와 깊은 사색을 통한 서정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도라지꽃처럼」이 보여주는 애틋한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이러한 서정미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따라서 "사닥다리 놓아 너의 눈물 끝의/푸른 강에 닿을 수 있"기를 염원하는 「도라지꽃처럼」은 여러 가지 일로 생활이 고단하지만 순수한 삶을 궁구窮究 하면서 평화로운 세게에 도달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말 그대로 '정신의 따뜻한 밥'과 같은 시라 할 것이다.
-<시사사, 7-8, 2012> (배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