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신호등 / 나희덕
신호등 / 나희덕
여름이 끝나갈 무렵, 저녁 산책을 해 본 사람은 알리라. 이파리가 어떻게 물들기 시작하며 풀벌레 소리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또는 바람이 어떤 서늘함을 숨기고 불어오며 얼마 남지 않은 빛 속에 어둠은 어떻게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지……. 이런 기미들에 몸을 맡기고 걸어 보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산책을 나선 것은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계시면 좀 편안해지시려니 했는데, 오히려 무언가에 부대끼고 있는 듯한 어머니와 얘기도 할 겸 산책을 나가자고 한 것이다. 호수 공원 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우리는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뀔 때까지 서 있는 동안의 짧은 침묵도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모녀간에 얘기다운 얘기를 못한 지가 오래 되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침묵을 깨고 어머니는 불쑥 내게 물었다. "너, 나 사랑해?"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마치 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처럼 절실하게, 어머니의 이 질문은 나를 몹시도 어이없게 만들었다. 예순의 어머니가, 그렇게도 조용하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가,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너, 나 사랑해?" 라고.
나는 성장기 동안 어머니를 좋아하면서도 무척 어려워했던 것 같다. 무턱대고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써 본 기억이 없으니, 이십 년 넘게 보육원 총무로 일하면서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다른 보육원 아이들과 똑같이 대하셨다. 얼마나 철저하셨는지 아이들 앞에서 나를 쓰다듬어 주거나 칭찬 한 번 해 준 적이 없고, 오히려 친자식보다 그 아이들을 더 귀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도벽을 일삼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 때문에 학교에 불려 다니기 일쑤였지만, 나의 어머니 자격으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간 적은 거의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런 엄마가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자라면서 엄마의 자상한 보살핌이나 애정 표현은 내 것이 아니겠거니 체념하는 데 익숙해졌던 것 같다. 다행히도 그런 성장기가 큰 결핍이나 상처로 남지 않은 것은, 십분심사十分心思를 일분어一分語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입장이나 성품을 이심전심으로는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보육원이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그 많은 자식들을 떠나보낸 뒤로 어머니는 부쩍 허전함을 느끼시는 듯했다. 그 동안 100명 가까운 식구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친구를 만난다거나 여유 있게 외출 한번 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새삼 돌아보아지기도 하고 때로 서글퍼지기도 하시는 모양이다. 이제 어머니 곁에 남은 것은 우리 삼남매뿐이다. 그러나 친정 가까이 이사 오기 전까지는 대화할 시간도 없이 전화로 안부만 여쭙는 정도였으니, 어머니는 이따금 내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그 쓸쓸함을 달래곤 하셨다. "엄마는 늘 바쁜 생활에 쫓기며 살았지만, 너만은 좀 여유를 갖고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엄마보다 오히려 더 바쁘고 가파르게 살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그러나 바쁜 것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다만 인품이 마모되지 않고 평온을 잃지 않고 결실을 남기는 삶이 되려면 더욱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 되지. 엄마는 너무 험하게 살아왔고 많이 상해 있음을 느낀다. 뒤늦게나마 곱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평생을 남에게 다 내어 주고 이제 빈 그루터기처럼 남은 어머니는 스스로의 지친 마음 하나 내려놓을 자리를 찾지 못해 힘들어하시는 게 역력하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때 몸살을 앓는 나무들처럼 닥쳐온 인생의 가을과 겨울 앞에 초연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으면서도, 나의 어머니가 그런 늙음의 경계에 서게 될 줄은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사랑이 많으셨지만 정작 사랑한다는 한 마디 대놓고 할 줄 모르던 어머니가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다니! 그것도 신호등 앞에서! 그만큼 누군가 곁에 있다는 걸 절박하게 확인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파란불이에요." 나는 대답 대신 어머니 손을 끌어당기며 서둘러 길을 건넜다. 늙은 어머니는 다 큰 딸의 손에 끌려오다시피 길을 건너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잘 마른 나뭇잎과도 같은 어머니의 얼굴과 조그마한 몸, 내 앞에는 젊은 날의 강인했던 어머니가 아니라 회한과 쓸쓸함을 가누지 못하는 나이 든 한 여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떨고 있는 그 어머니의 모습이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던 예전의 어머니보다 한결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두 손을 꼬옥 잡았다. "그럼요. 사랑하구말구요." 우리가 건너온 길 저편의 신호등에는 다시 빨간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지는 해를 등지고 걸어가는 우리 앞에는 긴 그림자 둘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해가 진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그날 나는 삶의 저녁에 다다른 어머니와 함께 걸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어둠이여, 조금 천천히, 천천히 와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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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09:13 http://cafe.daum.net/kcdance/LpJu/2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