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산문·소설

여왕의 남자 - 한기홍

시인 이가을 2014. 6. 2. 07:39

여왕의 남자 - 한기홍

 

 

 

  그녀는 여왕 폐하다.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을 땐 서시西施의 환생을 느끼면서 나를 전율케 한다. 폐하의 섬섬옥수를 쓰다듬을 수 있는 행운이 간혹 찾아오면 내 몸의 군살들은 급격히 수척해진다. 그녀에게는 확실히 지고한 황녀임을 인식케 하는 진한 선홍빛 향기가 배어나온다. 가만히 코를 들이대고 폐하의 귓밥에서 턱밑 목덜미쯤에 머물러 숨을 들이키면 은은한 라일락 향기가 숨을 멎게 한다. 그럴 땐 지그시 눈을 감고 구름 위를 살포시 디딘 보행자세로 행복에 빠진다. 폐하의 숨소리는 행복의 부드러운 톱니바퀴를 굴려주는 윤활유로서 잔잔한 감동을 더해준다.

  나는 여왕의 치세에 만족하며 결코 궁상맞지 않은 시종장侍從長으로 영위한다.

  그런데 역사상 모든 여왕 폐하들이 그러하였듯이, 나의 폐하도 변덕이 심하다. 오뉴월 종달새의 비행처럼 종횡무진 날아 나무에 앉다가 파르르 떨기도 한다. 나는 여왕의 남자이길 소원하지만 어느 때는 이방인이 된 것 같은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폐하의 변덕은 자주 반복되어 사계절의 순환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폐하의 우울과 변덕은 기실 나로 인해 야기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깃든 수심의 모양이 하도 농염하여, 짐짓 그 자태에 침몰하고 싶어 하는 나의 심술 끼가 만들어내는 바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왕 폐하를 너무 사랑하고 있다.

  폐하의 치세에 정정불안政情不安은 없지만, 궁정의 여러 후작侯爵들 중에는 야심가들도 있다. 그들은 은밀히 폐하에게 추파를 보내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포장하여 환심을 사려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폐하의 나에 대한 사랑은 총애가 아닌 연모임을. 나는 일개 시종장으로서 방자하게도 지엄한 폐하와 통정하고 있는 것이다. 폐하는 백설이 빛나는 설원에서 하늘하늘 춤추기를 잘한다.

  부드러운 선율을 타고 흡사 뼈가없는 듯 곱게 사리는 몸짓은 천상의 율동이 따로 없다. 언뜻 내비치는 수심어린 안색과 고혹적인 자태에 달빛도 수줍게 숨어 버린다. 나를 비롯한 폐하의 백성들은 그 춤사위에 영혼의 세척을 맛본다. 참으로 폐하는 모든 세상위에 군림해야 마땅한 성군聖君이 분명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폐하의 춤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오늘도 폐하의 침전 모퉁이에서 나는 기웃거렸다.

  여러 번 간언하던 바를 연인 관계의 힘을 빌려 다시금 주청하리라. 여왕폐하! 저 빛나는 설원에서 다시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옵소서. 폐하의 연무演舞는 백성을 이롭게 하고, 굳건한 나라를 경영하는 바탕입니다. 사사롭게는 이 미천한 신臣에 대한 은총이기도 하옵나이다…. 허나 대신들 앞에서 폐하의 눈자위가 붉어지면서 곱던 아미가 송충이처럼 말아 올려졌다. 경이여! 정녕 짐을 능멸하려는 것입니까? 삶이란 온갖 연유緣由와 질곡의 순환이요, 마음이란 항시 흐르는 물 속의 물거품과 같아서 유유히 떠다니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게요. 한번 꺼진 춤사위는 언제 올지 모르는 부정기선不定期船 쯤으로 경들과 백성들은 치부하기 바라오. 그대 또한 꽃을 꺾지 않고 지그시 관조하면서 완상하는 미덕을 가지시오.

  나는 참람한 마음으로 폐하의 질타를 받고 물러났다. 가슴 속에는 유폐당한 듯한 낙심과 설움이 솟아올랐지만, 호사가들의 시선이 두려워 더 이상 간언하지 못했다. 폐하가 말한 꽃 이야기는 옳은 말이었다. 대개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남성들이 있는데, 하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면 꺾어들고 감상하는 부류가 있고, 또 하나는 조용히 다가가 깊은 시선으로 관조하면서 꽃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는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폐하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를 보고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직설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인 나의 성정을 일깨워 주려는 삶의 스승과 같은 여왕 폐하.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궁시렁 거리면서 나는 궁정 정원너머 아련히 펼쳐진 설원을 망연히 응시했다. 강렬한 눈빛에 점점 눈이 시려와 이마에 손을 대니, 비로소 정원 한 구석에서 잊어버린 세월처럼 웅크리고 서있는 매화나무 가지의 두런거림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런데 설광에 반사되어 피어오르는 신기루 같은 환영들 사이로 중용中庸의 바늘방석이 얼핏 보였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폐하는 춤사위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오만과 독선에 물든 내 시력의 마비로 면면히 흐르는 춤을 언젠가부터 나 자신 만이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인터넷을 열람하다가 남녘 섬진강가에서 열리는 매화축제 사진에서 금년 들어 갓 터진 광양만光陽灣의 매화를 눈부시게 보았다. 눈 속에서 피는 오상고절한 매화의 품위와 고절함을 어찌 필설로 형용하리오. 매화는 나에게 꽃 중의 여왕이다. 단아한 꽃 향을 차 한 잔 마실 정도 음미하고 있으면, 꽃술이 가만히 나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고절한 기개에서 묻어나는 은은한 연정의 숨소리가 뜨겁게 다가온다.

  탁탁 털고 일어나 매화마을로 행장차려 떠나고 싶다. 울컥 치미는 도도한 꽃에 대한 몽상에 급히 펜을 들어, 요즘 갈짓자 행보에 쇠약해진 부끄러운 내면을 파지에 옮겨 보았다. 심히 창피한 일이다. 삼월도 무르익어 가니, 가까운 날 여왕폐하 매화를 알현해야겠다.

 

 

(2006 . 3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