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詩

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시인 이가을 2014. 12. 6. 12:55

아득하면 되리라/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감상>

 

 

 1977년 무인우주선 보이저1호가 태양계 행성을 탐사할 목적으로 우주를 향해 발사되었다. 보이저는 태양계 행성의 많은

사진들을 지구로 송신했다. 그 덕에 우리는 토성의 고리가 얇은 얼음조각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구를 떠난 지 13년

이 흐른 뒤인 1990년 2월 초, 보이저는 태양의 가장 바깥쪽 행성의 궤도를 넘어선 공간을 초속 18km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미 배터리는 다 닳고 관성으로만 진행하고 있을 보이저 호에 광속으로 신호를

보내 '카메라를 지구로 돌려 사진을 찍어 전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신호는 5시간 후에 60억km 떨어져 있는 보이저

호에 도달했다.

 

 몇 달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실현가능성을 기대치 않았던 이 명령에 따라 보이저는 90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태양

계의 가족별과 우주공간에 외롭게 빛나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 등을 찍은 수 십장의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태양계 행성

탐사 임무를 마치고 아무런 에너지도 없이 관성으로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보이저호의 충실한 명령수행은 많은 과학자들

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보이저는 이제 태양계를 완전히 벗어나 지금쯤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을 외롭게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이 외로운 우주여

행은 예상대로라면 앞으로도 이백만년 동안은 계속 되리라. 보이저가 보낸 이 한 장의 사진에 영감을 받아 칼 세이건은

자신이 쓴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공간에 외로이 떠있는 한 점을 보라. 우리는 여기 있

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성자와 죄인 등 모든 인류가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티끌과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우주에는 천억 개의 은하가 있다고 한다. 은하간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까운 은하인 안드로메다은하

만 하더라도 이백만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단다. 그 시공의 상상만으로도 아득함을 넘어 어질하다. 그렇게 견주어보면

이승에서의 삶 전부가 아주 짧은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별들을 인도양 모래알처럼 쪼개어 생각하니 사랑하는 사

람과 나의 거리가 다시 아득해진다. 다만 달과 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까지 함께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볼 수는 없는 것. 그러니 그 우주의 한 귀퉁이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어른거리는 냉수사발을 그냥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으라.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 발사를 앞둔 시방 다시 갈증 때문에

냉수를 마실 밖에는.

 

-권순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