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산문·소설

은빛 매미의 눈망울 - 한기홍

시인 이가을 2014. 6. 2. 07:48

은빛 매미의 눈망울 - 한기홍



 

 제법 많이 들이킨 술의 얄궂은 심술인지, 내 안에 숨겨진 야성의 드러남인지 아무튼 어이없을 정도의 분노가 솔솔 피어올라 대작하던 동네친구와 심하게 다투게 되었다. 친구간이라는 허물없는 사이라서 그런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욕설을 내뱉으며 당장 멱살잡이 할 것 같이 서로 으르렁댔는데, 피차간 유형무형으로 조금씩 맺혀있던 그간의 감정이 폭발하여 끝장을 볼 것같이 다투었다.

 다행히 다른 친구가 와서는 강하게 중재하여 불상사는 없게 되었지만, 한동안 다툰 친구와의 마음 속 앙금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방에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니, 초저녁의 일이 우습기도 하고 왜 그렇게 화가 났었나 후회되었다. 아마 친구도 똑같이 안타까워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경솔했던 것 같다. 그때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정에 둥그런 원이 생겨나고, 빛나는 두 개의 눈망울이 빙긋이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저것은, 은빛 매미의 눈망울이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 아깐 정말 미안했네 …."

 

 삼십 사 년 전. 십 삼세 소년이 본 세상과 우주는 어떠했을까. 부모님과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뒹굴면서 동네 벌거숭이 친구들과 뛰어 놀던 것이 하루의 전부였고, 공부는 뒷전으로 학교 가기가 무척이나 싫었었다. 풋풋한 흙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는 원시의 황토 길에서 마음껏 뛰어 다니던 마냥 푸르른 동심은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기만 했다. 충청도 공주 읍내의 교외(郊外)에서 시퍼런 자연과 더불어 천진난만하게 웃고 훌쩍이며 근심 없이 지내던 날들은 소년에게 인생의 우주요, 곧 낙원이었다.

 그 날도 뜨거운 팔월의 한낮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보리밥에 섞인 고구마 토막을 골라내며 점심을 급히 먹고서, 나는 집 뒤에 있는 상수리나무 숲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울창한 관목 사이로 쭉쭉 뻗어있는 상수리나무의 검은 몸통들이 마치 열병식을 하듯 산자락에 싱그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나절 집 앞에서 이웃집 뺑코녀석에게 칼싸움으로 한방 먹였는데, 녀석이 무척 억울했는지 단짝 왕눈이와 합세하여 다시 도전해 온 것이었다. 장소는 상수리나무 숲 너머 커다란 묘가 있는 잔디밭이었는데, 나를 지원할 땜통녀석이 윗마을로 심부름 가고 없었기에 부득이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칼싸움의 승부결정은 상대방의 나무칼을 쳐서 떨어뜨리거나, 솜씨를 부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칼을 버리고 항복하게 하는 식이다. 그러나 나무칼을 떨어뜨리면 재빠르게 다시 주워들거나, 패색이 완연해도 쉽사리 승복하지 않아 결국 강한 국소 타격으로 울음을 터트리게 하거나 칼을 멀리 쳐내어 버리고, 상대방의 목에 승리자의 칼을 대기 전에는 승부의 끝은 없는 것이었다.

 오전에 뺑코는 손목과 어깨에 강한 타격을 받고 거칠게 덤벼들었지만 동네 아저씨의 제지로 울분을 삼켜야 했었다. 혼자서 두 녀석을 어떻게 상대해야하나 망설임과 더불어 두려운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멀리 보이는 묘지 터에는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앞에 묘하게 구부러진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보여 옆으로 우회하기로 했다. 그 나무 밑둥 부분은 안보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 해서다. 지난 봄 그곳에서 나는 못 볼 것을 본 듯이 진저리친 일이 있었다.

 금방 덮은 것 같은 나무 밑 흙더미를 친구들과 헤쳐보고는 모두들 소리치며 도망갔었는데, 흙 속에서 나온 것은 물컹물컹한 간난아이의 태반이었다. 동네에서 삼총사나무라 부르는 상수리나무 세 그루 앞에 당도한 나는 잠시 망서렸다. 산중턱에 둥그렇게 공지를 만들고 있는 묘터에 먼저 온 모습을 드러내기가 쑥스러워서다. 허리춤에 꽂은 나무칼을 뽑아 살펴보았다. 집안 마루 밑에 숨겨놓은 세 개의 칼 중 가장 맘에 드는 놈이다. 얼마 전 막내삼촌이 참나무로 깎아준 그야말로 보검이다. 뺑코의 칼은 물푸레나무라 걱정 없지만, 왕눈이 녀석의 칼이 문제다. 틀림없이 박달나무라고 자랑하는 거무죽죽한 놈을 들고 올 것이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잠깐 구름에 가렸던 햇빛이 강하게 쏘여왔다. 머리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무심히 눈앞의 상수리나무를 본 순간, 나는 온몸이 굳어지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무의 검은 몸통에 앉아있는 희한한 곤충을 보았기 때문이다. 매미 같았는데, 놀랍게도 내 주먹만했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경이의 동물이었다. 다른 매미들처럼 검은 빛 몸뚱이가 아니고 은빛을 띄고 있는 흰색의 날개를 가졌고, 왕방울 같은 눈알에서는 순백색 빛이 쏘여 나오고 있었다.

 그 거대한 눈망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나는 얼마 전 시골의 할아버지댁 정자나무 밑에서 보았던 여름밤의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별의 바다를 생각해 내었다. 시냇물처럼 흐르던 은하수의 물결과 광활한 우주에서 보내오는 억만 개의 별빛들 …. 막내삼촌은 저건 무슨 성좌니, 무슨 별자리니 하면서 꿈 많은 소년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부풀려 놓았었다.

 이놈을 잡아야지! 살며시 꽁지 쪽으로 손을 올려놓다가 멈추었다. 매미의 은빛날개가 부르르 떨었기 때문이다. 흠칫 놀라면서 바라본 매미의 무채색 눈망울에서 무언가 은은한 빛이 번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눈빛을 받고서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게 붙잡혀 겪어야할 매미의 애처로움을 가엾게 생각하기보다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순하디 순한 하얀 그리움이 매미의 두 눈에서 빛살처럼 뿜어져 나와 내 가슴에 마구 달려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젠가 아버지와 다투시고, 구슬프게 우시다 고개를 든 어머니의 눈물 젖은 눈망울과 비슷했다.

 나도 모르게 서서히 손바닥을 거둬들이는 순간, 갑자기 후드득 소리가 들리면서 매미 옆으로 무언가가 휙 날아갔다. 돌맹이다! 황급히 뒤를 돌아다보니 뺑코와 왕눈이가 건너편 바위 위에서 웃고 있었다. 외마디 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는 순간, 붕붕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칼을 툭치는 충격을 받으면서 나는 우지끈하며 관목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노란 하늘이 묘지 터처럼 눈앞에서 번쩍거리고, 은빛매미는 소년의 가슴에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심어 놓은 채 날아가고 없었다. 대결을 포기하고 순순히 항복한 다음, 산을 내려가는 내 머릿속에는 노란 어지러움증과 더불어 온통 붕붕대는 매미의 하얀 눈망울이 어른거려 온몸을 휘청거려야만 했다.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2층에서 내려 온 모팀장이 굳은 얼굴로 쇼파에 앉아 있었다. 당장 거친 항의가 예상되는 분위기다. 내가 맡은 업무와 협의가 잘 안되어 서로간의 주장이 첨예한 터였다. 그가 업무수첩을 펼치며 조목조목 항변을 늘어놓을 태세로 입을 여는 순간, 내가 먼저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됐습니다. 팀장님의 의견대로 시행합시다" 활기차게 말했다.

 그의 얼굴이 한동안 의아로운 표정으로 있다가, 환해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 후, 묵묵히 백지에 두 개의 원을 그려보았다. 그림에 솜씨가 없어 매미의 눈알 같지는 않았다. 무언가 각박한 거래나 날카로운 이해득실을 따질 때면, 담배를 피워 물고서 한번씩 은빛매미의 눈망울을 떠올리는 습관이 굳어졌다. 남들이 이해 못할 내 나름의 괴벽이지만, 나에게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나라에 그리움을 듬뿍 안고서, 입장료 없이 틈입할 수 있어 좋다.






 (2002 . 4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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