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자료

詩의 첫 행은 어떻게 하나 - 조병무

시인 이가을 2014. 12. 5. 13:01

詩의 첫 행은 어떻게 하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갈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딘가 떠돌아 다니는 어떤 기 같은 것을 붙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그 기 같은 것을 붙잡았을 때 어떤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것이 시의 첫 행입니다.


그럼 시의 첫 행은 어떻게 잡아야 하고 표현해야 할 까요.
참 어려운 질문의 하나가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모든 일들에 해당될 것입니다. 가령 집을 지을 때 처음 어떻게 합니까? 사랑을 할 때 처음 어떻게 하나요? 멀리 여행을 할 때 처음 무엇을 해야 하나요? 누구와 만날 때 무슨 말부터 먼저 할까. 등등의 질문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시의 첫 행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계절도 봄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이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달수도 1월부터 시작됩니다. 요일도 사실은 월요일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것은 자연스러운 습관의 원리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 순서를 바꾸어 해도 되고 바꾼 상태에서 추진해도 됩니다.

그러나 감정의 산물인 시의 첫 행을 무엇부터 해야 하느냐는 것은 어려운 질문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해보기 위해서 많은 시인들은 어떻게 시의 첫 행을 쓰느냐 하는 점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장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하늘이여 -조지훈 「첫 기도」

보라! -박종화 사의 예찬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노천명 「사슴」

새야 -조병철 「새야 너처럼 날 수 있다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박두진 「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그리움」

임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김영랑 「4행시」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누가 떨어뜨렸을까 -문덕수 「손수건」

하늘에서 내린다면 어떨까 -조남두 「낙엽」

주여 -추영수 「기도서」

 

이러한 첫 행은 대체로 호격조사나 명령형, 의문형으로 끝나는 말로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첫 행은 대체로 정감적인 것이 아니면 호흡이 큰 형식의 시로 나타나게 됩니다.
호격조사는 부르짖음이나 기원, 소망의 애조 등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명령형은 감동적인 형태나 욕구에 대한 태도 등으로 나타나게 되지요. 의문형은 실제적인 의문과 감동의 모습을 변형시킨 화자 자신의 정서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첫 행의 시는 대부분 호흡이 좀 더 큰 상태로 표현되고 호소나 애절한 갈망이나 기원의 감정이 크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첫 행의 다음은 대체로 그 첫 행을 따르는 감정이나 정감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첫 행은 어떨까요.

 

꽃 속에 들어가 창을 연다 -강민 「꽃 속에 들어가」

누가 죽어 가나 보다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보일 듯 말 듯 하는 천 편의 빛 속에 이 바다가 있다. -이규호 「바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김동명 「파초」

나는 피곤할 때 꽃밭에 물을 준다. -조영서 「꽃밭에 물을 주면」

눈은 살아 있다. -김수영 「눈」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이 상 「거울」

나 두 야 간다. -박용철 「떠나가는 배」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서정주 「화사」

비가 오고 있다. -박용래 「우주행」

 

물상의 형상이나 그 행위, 위치 등에 대한 단정적인 면으로 첫 행을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의 경우는 이 첫 행이 하나의 축이 되어 그것을 풀어 가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첫 행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의 연상작용이 그 다음 단계로 이어져 몇 가지의 과정을 거쳐서 한편의 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첫 행이란 시의 첫 이미지의 발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로빈 스켈톤이란 학자는 시의 첫 행은 물론 2차 3차적 이미지의 연속 과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인 이미지는 시인의 현실적 세계의 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이 일차적 이미지의 반영인 이차적인 이미지를 산출합니다. 시인의 성격에 의해서 그 자격이 결정되고, 시인의 다양한 마음의 각 면에 서로 다른 앵글을 맞추면서 이차적인 이미지는 비록 일차적인 이미지에 의해 발생된다고는 하나 그 독립되어 존재하는 다른 이미지들의 상호 과정을 통해 창조되며 비전의 법칙을 스스로 구현합니다. 일차적인 이미지는 통제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 현실의 반영이므로 한정되고 규제되며 개념들과 일원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이미지는 실제 현실로서가 아니라 일차적인 이미지의 관점에서만이 한정되며 분석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명백히 그들의 동기를 측정하게 됩니다. 그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어쨌든 우리는 더욱 나아가 제 3차적 이미지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때 이미지에서 산출된 이미지, 세계로부터의 추상에서 다시 추상된 세계는 어떤 한정된 영역과 실제 현실에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의 우주 안에 존재하는 독립된 동일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주는 세계로부터 순수하게 정체되어 그 이상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스켈톤의 말과 같이 첫 행의 이미지가 그 다음에 오는 모든 이미지의 연결이 되어 그것이 전체의 이미지로 확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첫 행의 시는 전체를 압축적으로 하여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이상화의 시에서는 전체의 주제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 시의 첫 행은 전체시의 내용과 완전하리만큼 직결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첫 행의 이미지가 그처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시의 첫 행은 전체 시의 주제와 방향과 시어의 선택 등 시의 전반을 동쪽으로 가게도 하고 서쪽으로 가게도 합니다. 그래서 시의 첫 행을 찾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혹시나 여러분들은 여행을 할 때 메모지를 준비했다가 순간 떠오르는 좋은 구절이나 주변 사람들이 우연히 이야기하는 가운데 아하, 그 좋은 말이라고 생각되면 기록으로 남겼다가 적절하게 활용하는 방법도 시를 창작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좋은 첫 행이 생각나면 그것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를 꼼꼼히 따지고 전체 윤곽을 잡아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첫 행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어렴풋이 짐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살아 있는 체험을 들어 보기 위하여 몇몇 시인의 증언을 토대로 시의 첫 행을 어떻게 시작하고 전체 작품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 유경환 시인의 시의 첫 행
별다른 생각없이 시의 첫줄을 써 왔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첫 시작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쓰려고 하는 것을 며칠 몇 달씩 가슴에 넣고 삭여오다가 잎이 돋듯 그렇게 나오는 것을 원고지에 옮겨 써왔던 나의 시작태도에 기인했던 것일게다.


그러나 한 십여년 전부터 이런 나의 시작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난 그것을 겪어야 할 변화라고 생각하고 싶다. 쓰려고 하는 내용을 유도하는, 그런 의미를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내적인 작은 고민이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고민은, 첫줄만 써놓고 버리는 원고지의 양을 차차 늘여서, 오히려 시 작업에 저해요소로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마 이것은 나만의 경우가 아닌 듯 싶다. 시의 첫줄이 그대로 시제가 되는 예를 미루어 보거나, 또는 내용 전체의 의미를 표상하는, 함축적인 감각을 지니게 되는 예를 미루어 볼 때에, 나만의 고민이 아니구나 하고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시를 어렵게 생각하게 되는 한 과정 또는 매듭 단계에서 겪는 고민이 아닐까 여겨진다.
쓰지 않고선 못 배길 정도로 내적인 발표가 이루어진 경우엔 쉽게 나오고, 그 대신 써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당위성을 가지고 시작할 때엔 어렵게 나오게 된다.


나의 경우 길을 가다가, 책을 보다가, 또는 산책을 하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을 아무데나 한 줄씩 메모해 두는 버릇이 있는데 거의 이 한 두 줄의 메모가 그대로 첫 시작의 첫줄로 등장할 때가 있다.
첫 시작의 첫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 시의 경직성을 띠고 전개되기 쉽고, 첫 시작의 첫줄에 전연 의미를 내포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도입구의 역할만 하게 쓰면, 시는 자연스럽게 풀려 나갈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요즘 첫 시작의 첫줄에 마음을 써야 하는 모순의 고민을 지닌다. 이것은 시를 어려운 것으로 알기 시작했다는 한 반증이 아닐까 자위해본다.

 

□ 신중신 시인의 시의 첫 행
시를 쓸 의욕이 팽배해지면 나는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기 마련이다. 습작 노트를 펼쳐두고 볼펜을 손에 쥔 채 어떤 긴장의 늪으로 빠져든다.
시는 현실 자체와는 분명히 다른 또 하나의 경험세계이다. 현실과는 전혀 별개였던 어떤 것이 완성의 순간에 현실의 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 다시 말하면 변용의 과정에서 미묘한 갈등과 모순을 겪어내야만 한다. 그것을 초월에의 의지라 해도 좋고, 또는 창조적 투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서 첫 행은 이 투쟁의 전초기지가 되는 셈이다.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촉발성, 예민한 집중력이 이 첫 행에 요구된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개체에 윤곽을 주어 구체적 사물로 떠올리게 하는 일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시의 첫 행은 그 예사롭지 않은 일을 감당하고 있다.
나는 가장 밝은 백열등 불빛을 받으면서 오랜 시간 펼쳐진 하얀 백지의 강박감, 그 공포를 수없이 체험했다. 의외로 쉽게 술술 풀리면서 한 편이 순식간에 이루이지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개는 황막한 관념의 벌판에 외로이 던져진 채 그 벌판을 헤쳐 나오려는 초극에의 안간힘을 겪기 마련이다.


첫 행이 출구의 열쇠가 됨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다. 그래서 좀체 시행이 만들어지지 않는 날엔 이것저것 낱말만 흩뜨려 적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엉뚱하게 사화집 따위의 다른 시집을 펼치면서 남의 시작품 첫 행이 어떻게 쓰여졌나를 일별해 보기도 한다. 실로 막연하고 불확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의 첫 행은 창조 행위 중 가장 지적 모험정신이 충일한 창조작업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것은 나에게 있어선 끝없이 되풀이되는 비상에의 출발점이다. 때문에 첫 행이 풀려나가면 그것을 중도에서 팽개치기가 어려워 좋든 궂든 한편을 얻는데 귀착되는 점이 또한 나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 유안진 시인의 시의 첫 행
나는 언제나 시의 첫 행을 홀연히 찾아오는 한 줄의 글발로 시작한다. 발상의 잉태라면 첫 행을 쓰는 것은 곧 시의 출산의 그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시의 첫 행은 때로는 발상 다음에, 때로는 발상과 동시에 불현듯 찾아오는 글발을 그대로 한다. 그래서 찾아와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억지로는 시작이 가능하지 못한 것이 나의 약점이다.
어느 때는 시의 발상이 쉽기도 하다. 무수한 발상 다음에도 한 줄의 첫 행이 찾아오지 않아서, 시상은 그 자체가 태중에서 사산되어 버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백지와 대결한 각고의 진통을 거쳐 가까스로 한 귀절이 찾아오기도 하나, 어느 때는 실로 저절로 발상과 동시에 한 줄의 글발이 나타나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시란 <쓰여지는 것>이지 쓰고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현듯 찾아드는 한 줄의 글발>은 찾아 나선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시적 영감이 <표현의 옷>을 입고 찾아와 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때문에 불현듯 찾아와 주는 한 줄의 글발, 그것은 한 편의 시의 표현방식을 그대로 결정한다. 뿐만 아니라 이 첫 행에 따라서 다음에 전개되는 흐름과 모든 어휘까지도 거의 결정해 주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저절로 떠올라 주는 한 줄의 글귀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불현듯 찾아드는 한 줄의 글발에 따라서 산문시도 운문시도 되고, 마디마다 사용되는 언어가 풀어지기도 맺어지기도, 묻는 것도 대답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때로 이렇게 찾아든 첫 행을 다른 위치로 바꾸려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첫 행이야말로 영감이 어떤 옷을 입고 찾아와 주느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무슨 말 무슨 구절이든 상관없다. <불현듯> <홀연히> <문득> 찾아와 주는 <표현의 옷>을 입은 영감의 발현이 곧 첫 행이 된다.

 

□ 홍신선 시인의 시의 첫 행
나에게 시의 첫 행이란 정해진 것이 없다. 말하자면 시의 첫 행이라고 해서 그 시작의 맨 처음에 씌어진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맨 나중에 작품의 첫 행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작품의 전체성과 유기성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시작과정이기 때문에 첫 행으로 처음 씌어졌던 것이 중간부분으로 다시 자리바꿈을 당하게도 되고 또는 맨 나중에 썼던 한 행이 첫 행으로 턱 자리잡기도 하기 때문이다.

 

□ 김종철 시인의 시의 첫 행
내 개인적인 시작법에 있어서는, 그 어떤 시의 발상이나 동기가 있더라도 맨 처음 시의 첫 행에서 그러한 발상과 동기를 언어로 육화하는 데 있어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면 며칠이고 간에 무수한 파지와 더불어 첫 행의 고통이 한없이 이어진다.
<시의 첫 행>은 그만큼 나의 시작에 있어 대단한 의미와 고통을 수반하고 있다.


그러한 버릇은 남의 시를 읽는데도 첫 행에 많은 비중을 두고 몇 번이고 첫 행을 되풀이 읽고서야 전체 작품을 바라보는 습성은 이제 체질화되어 버린 셈이다.
나의 경우, 첫 행을 어떻게 써놓느냐에 따라 순산을 할 수도 있고 난산을 거듭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 첫 행은 때에 따라 시작의 첫 의도와는 달리 전혀 엉뚱한 곳으로 천착되어지고 있음을 나는 종종 경험하고 그러한 작품들이 내게 다수 있는 편이다.


가령 나의 졸시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는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내 고향 한 늙은 미루나무를 만나거든
나도 사랑을 보았으므로
그대처럼 하루하루 몸이 벗겨져 나가
삶을 얻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고 일러주오

이 시에 있어서 <내 고향 한 늙은 미루나무를 만나거든>이르는 첫 행은 그냥 쉽게 써놓고 보자는 속셈이었다. 더구나 내가 가장 싫어하는 범속한 언어들, 특히 <내 고향>이라는 구절은 사실 내가 서 있는 현실과 자신의 근원을 압축하고자 하는 모티브로 생각한 것인데 시어로 표출해 버렸고 나에게 있어서는 특이한 시풍으로 흘러버린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시는 여섯 파트로 행간이 구분되어 있으면서 그 파트의 첫머리마다 <내 고향>이 반복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시의 첫 행은 그만큼 내게 있어 작품의 전반을 지배하고 전체 분위기를 암시하는 중요한 일절로 나는 바라보고 있다.

 

□ 임강빈 시인의 시의 첫 행
시의 첫줄에서부터 욕심을 너무 부리거나 긴장되어 있으면 그 다음 전개에 힘이 부치는 경우가 많다.
시의 첫줄을 찾아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아픔이 거기 따르기 마련이다. 물론 영감같은 힘에 의하여 수월하게 얻어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이 첫줄을 잡기에서부터 괴로운 싸움은 시작된다.
어떻든 첫줄이 손쉽게 잡히면 대개 그 다음은 수월하게 전개된다. 시를 오래 품고 매만졌다거나 그렇지 아니했다는 것으로 해서 시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몇 달을 두고 주물럭거린 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시에 너무 욕심을 부렸거나 긴장되어 있을 때 대개는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스포츠 중계같은 것을 들어보면 운동선수의 어깨나 손목에 힘이 들어 있으면 그것이 흠이 된다는 해설가의 말이다. 힘은 운동선수에게 불가분의 것일텐데 오히려 이 힘 때문에 강공이 빗나간다든가, 정확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요즘 나의 시작에 의도적으로 이 힘빼기 작전을 원용해 보고 있다. 말하자면 과욕을 피해보자는 것이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막 풀려난 나비 한 마리

어느 수월히 만난 첫 귀절이다. 벌써 몇 해가 된다. 그러면서 여지껏 미완성품으로 있다.

첫줄에 힘이 들어 있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시는 어떤 개념이나 도식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인 만큼 시의 전개에 있어서도 어떤 공식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시의 매력은 비유와 상징의 교묘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배후에 깔린 상상력의 무한성에 있다. 때문에 나는 시의 전개에 있어 포괄적인 조화와 언어의 절제에 민감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 장윤우 시인의 시의 첫 행
시의 생명은 첫 줄에 매달렸다. 오히려 제목은 뒷전이다. 첫 줄에 암시된 시제, 발가벗긴 장윤우의 실상과 허상, 그런데 말이다.
나는 늘 사기를 친다. 철면피가 된다.
나를 드러낸 시가 아니라 거짓으로 땜질한 거짓 작품이 뻔뻔스럽게 도사리고 그것뿐인가,

활자의 연속성으로 인해 늘 도망치고 다닌다.
내 시- 특히 첫 줄에서 잡힌 사기죄로 인해, 술과 어둠으로 도망을 치고 잠 속에서도 도망자가 되면서도

나는 또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허나 쫓기는 시한성이 아닌 때, 때론 꿈을 꾸는 물새처럼 꾸역 꾸역 안개를 토해놓기도 한다. 그것은 내 자식이 아닌것도 같고 또 자위후의 피곤처럼 더 손을 댈 기력도 없는데, 우연찮게 그런 작품이 건질만한 것이기도 하다.
56년 5월 24일 자유신문에 박혀진 자화상의 첫 줄「나여, 한번 가득하도록 안아보고 싶은 항아리」에서 68년 2월 29일 대한일보에 난「그 겨울, 전차의 포신이 느린 그림자」에 이르기까진 스스로 감탄하는 자족의 생활이었다.

 

□ 김윤희 시인의 시의 첫 행
시의 첫 행의 발견은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추진력을 수반한다. 이미 저 암흑의 늪에서부터 태동하는 작은 등불을 보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속에서 얼마든지 중절될 수도 있고 모양지어 출생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미숙아임에 틀림없다. 단순한 출발의 원동력이 되었던 첫 행이 별개의 독립된 행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수도 물론 있다. 즉 한 행이 곧 완전한 한 연이 되기도 하며 그 때는 그만큼 보이지 않는 무수한 행을 앞뒤에 거느리고 있으며 그것은 백지의 공간으로서 충분한 침묵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보통 나의 습관으로서의 시작태도는 첫 행이 독립적인 의미없이 하나의 서술방법으로서 차라리 둘째 행의 보조나 수식어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소멸하고 싶어라
가장 허무하게……①

올 여름에 꼭 팔아 버리려고 했던 집의 개……②

 

앞에서 보듯 ①의 첫 행은 독립된 행이 되지만 ②의 둘째 행은 설명적 구실을 하고 있다. 이렇게 첫 행에서 절대적 의미의 가치와 비중을 부여함으로써 전체 시의 중요한 요약이 형성되기도 하고 하나의 시의 첫걸음을 위한 동기에 그치는 수도 있게 된다. 나는 최근에 시의 첫 행을 곧 그 시의 제목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이 경우 첫 행의 비중은 상당하다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첫 행의 발견은 이미 숙명적이다. 이미 임신했으므로 태아가 급속도로 자라나서 드디어 몸밖으로 모양을 지어 나오려는 그 추진력을 부정하지 못한다.


결국 내가 지은 사물에 대한 미흡한 명명 때문에 뉘우치고 다시 그 사물들이 일제히 일어나 돌아서 버리는 독특한 배신감도 남의 것은 아니리라. 첫 행을 함부로 시작해서는 안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시를 사랑하는 여러분,
대부분의 시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시의 첫 행의 중요성이란 첫 출발과 같다는데 있고 이미지의 첫 발상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는 듯합니다. 시의 첫 행은 이와같이 다각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시의 첫 행은 여러 시인들의 진술에서도 보았듯이 전체 시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첫 행의 발상을 위하여 인고하고, 찾아 나서고, 깊이 생각하고 하는 등의 고통과 번민과 또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이 시의 첫 행을 찾는 작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첫 행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시의 첫 행을 시의 제목으로 받아들이는 시의 경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아내의 나라 (김일준)
불의 이야기 (김원호)
비가 오는 여름 밤은 (박성룡)
낯선 사람끼리 모인다 (신명석)
내 이렇게 살다가 (신중신)
동백꽃은 (이수복)

 

시의 첫 행이 시의 제목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더러 있습니다. 그 첫 행이 시의 전체를 보다 뚜렷하게 내 세울 때 그런 경우가 됩니다. 시란 그 제목도 중요하기에 시인들은 많은 정신적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러한 제목은 이미 전체 주제를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의 첫 행은 이와 같이 중요한 요인을 갖는다는 것은 이러한 여러 의미에서일 것입니다.
자, 사랑하는 여러분, 시의 첫 행을 생각하면서 귀한 하루를 보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