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붓
안성덕
1
지렁이 반 마리가 기어간다
허옇게 말라가는 콘크리트 바닥에
질질 살 흘리며 간다
촉촉한 저편 풀숲으로 건너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라고
토막 난 몸뚱이로 쓴다
제 몸의 진물을 찍어
평생, 한일자 한 자밖에 못 긋는 저 몸부림
한나절 땡볕에 간단히 지워지고야 말
한 획
2
고무타이어를 신었다
중앙시장 골목,
참빗 사세요 좀약 있어요 고무줄도 있어요
삐뚤빼뚤 삐뚤빼뚤
좌판에 널린 밥줄을 풀어서 쓴다
바싹 마른 입에 거품을 물려는 듯
붓 끝에 진땀을 찍으려는 듯
제 몸 쥐어짜내며 기어가는 사내
몽당연필 같은 몸뚱이
한 줄 더 써내려 필사적으로 끼적댄다
한 자 한 자 몸뚱이가 쓴 바닥을 지우며
기억뿐인 다리가 따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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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반 마리가 기어간다니? 그는 이미 몸의 반쪽을 잃어버린 것이다. 허옇게 말라가는 콘크리트 바닥에 온몸이 상하면서도 그는 가야만 한다. 지렁이가 가려는 촉촉한 저편 풀숲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고난의 길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렁이는 온몸의 힘을 다해 절대 절명의 한 획을 긋는다. 자신의 꿈이자 유언이 될 그 간절한 한 마디를.
온몸이 붓이 된 존재로서 또 다른 그가 등장한다. 고무타이어를 신고 중앙시장 골목을 누비는 그가. 그는 왜 하필 참빗, 좀약, 고무줄을 파는가. 추억 속에만 살아있는 물건들. 사라져버린 자신의 다리처럼 그것들은 애잔하다. 온몸으로 힘겹게 써내려가는 그들의 한 획 한 획은 필생의 절규를 담고 있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의 흔적을.
이혜원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