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詩

조롱의 문제 - 나희덕

시인 이가을 2014. 6. 2. 06:44

조롱의 문제 / 나희덕

 

조롱은 새를 품은 채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철망 사이의 공기 함량이 너무 적었다

조롱의 문제는 무거움보다 조밀함에 있었다

가늘고 촘촘한 정신을 두른 조롱은

새의 눈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동안 조금씩 녹슬어갔다

녹슬어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도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먹었다

조롱은 녹슨 방주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새가 가진 것은 조롱 속의 허공,

새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소리를 흘려보내

조롱 안과 밖의 공기를 드나들게 하는 것이었다

닻줄 구멍에서 닻줄을 끌어내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개를 파닥이는 것이었다

물론 조롱에게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조롱 밖의 권한이었다

물과 모이를 갈아주는 손은

이내 문을 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닫힌 문으로 절망은 더 잘 들어왔지만

철망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그들을 견디게 했다

희박해지는 공기 속에서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출간했다. 산문집 <반통의 물>이 있고, 옮긴 그림책으로 <조각이불>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대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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