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 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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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갈대와 억새를 명확히 구분해 둬야겠다. 억새는 산과 들의 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는 반면 갈대는 강가나 습지에서 주로 자란다. 하지만 그 분별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둘 다 벼과의 풀로 억새의 이삭은 흰색인데 바람에 날릴 때는 마치 32분음표를 연상케 하며 정갈한 맛이 있지만 갈대 이삭은 갈색으로 겨울 털갈이하는 들짐승의 터럭처럼 더부룩하다.
그런 갈대의 등본이라니 시 제목부터 심상찮고 만만히 읽힐 것 같지 않다. 편의상 ‘등본’에 방점을 찍고 갈대의 이미지를 겹쳐서 다시 읽는다. 저녁 무렵 한때 염전이었던 무성한 갈대숲에 멈춰선 시인의 풍경 하나 오롯이 잡힌다. 바람 부는 갈대밭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를 환기하면서 바람의 잔가시 같은 그 새들이 갈대가 ‘통증처럼 뱉어낸’ 것임을 알았다.
시는 삶을 성찰하면서 삶의 가장 위대한 텍스트인 자연을 감각해가는 절차다. 갈꽃이 진 갈대는 촉이 부러져나간 펜대처럼 서있고, 허공의 새떼는 석양이 배경으로 깔릴 때 부러진 펜촉 같기도 했겠다. 그리고 소금처럼 일어서는 설산을 추억하며 갈대는 부르르 휘며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걸 보며 시인은 스스로를 갈대와 같은 존재라 여긴다.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나를 흔들고 갈대를 흔든다. 갈대의 핏속에도 나의 계보에도 늘 흔들리고 일렁이는 바람이 유전되고 있다. 늦가을 석양 무렵의 갈대는 그래서 통증이 더 깊어진다. 어느 세월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내 결의가 있었지만, 바람에 허리 꺾인 아버지의 뼛속 바람을 나 역시 걷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아버지의 생애가 갈대였던 것처럼 시인도 바람을 모두 통과해야 그 무거운 직책으로부터 헤어날 것을 안다. 내가 아프면 세상이 아픈 법이기도 하지만 통증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그 갈대를 보면서 세월의 운명적 고통과 풍파를 발라내고 있다. 자연의 그늘진 곳을 바라보는 시인의 빛나는 서정이 돋보인다. 특히 관념에 객관적 상관물을 대입시켜 통찰하는 능력과 간절하게 시를 붙드는 시정신이 탁월하다.
참고로 시의 마지막 부분이면서 시집의 제목이기도한「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모 에어컨 CF 카피로도 쓰인 바 있다.
권순진 (시인)
갈대 등본을 뗀다. 염부의 가문을 읽는다. 바람이 거느린 노복들이 이룩한 등본은 설산을 이룬 소금꽃 만발한 염전. 허공에는 부러진 펜촉들이 뼛속 깊이 박혀 있다. 휜 등에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을 다 날려보낸 시린 고백이 석양빛을 거느린 모의(謀議)만 화석으로 남은 저녁,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꺾인 家長 아버지 뼈 속에는" 피맺힌 울음의 악보가 시의 초본이다.
전다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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