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 김기택
달팽이 지나 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자리를 견디고 있다.
ㅡ시집 ‘소’ 에서
김기택 : 1957년 경기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 ‘껌’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감상>
무언가 지나간 자국, 천천히 오래오래, 거칠게, 삶을 긁은 자국이 얼룩이다. 얼룩은 새로운 길 앞에서 금방 지워지기도 하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이 되기도 한다. 삶은 원하지 않아도 늘 새로운 길을 가야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해야 한다. 달팽이의 물렁물렁함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고, 마른자리를 적셔 길을 내듯, 우리 모두도 그렇게 견딘 얼룩이라는 기억을 먹고 살아간다. 지워지면 지워지는 대로 지워지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은 대로 물렁물렁 하고 축축했던 것이 얼룩의 실체라고 하나의 대상 앞에서 견고하고 깊이 있게 노래하고 있는 이 시, 시인은 늘 약자의 편에 서 있다. (권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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