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의 실타래1 ~ 동충하초 / 한기홍
동충하초(冬蟲夏草)
내가 갑자기 누에의 기묘한 일생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동충하초(冬蟲夏草)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애마(愛馬) 프라이드를 타고 출근하는 아침 길은 언제나 그랬다.
일직선으로 뻥 뚫려 있는 김포 매립지로 향하는 도로는 언제 보아도 운전자를 흥분하게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정체되는 도심의 도로와 달리 언제나 편안한 마음을 지닐 수 있어서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늘상은 금물이었다. 매립지를 향하는 트럭들이 앞 뒤 분간 없이 마구잡이로 달리기 때문이다. 나는 핸들을 움켜잡아 안쪽으로 조이고는 전방을 주시하였다.
율도 입구를 통과하면서 언뜻 살핀 주행(走行) 게이지에는 사만사천사백사십사 킬로미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순간 기이하게도 사자(四字)가 하나 둘도 아니고, 다섯 개의 자릿수를 몽땅 차지하고 있는 이 우연한 일치에 신기하다기보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감쌌다,
한국인이 갖는 사(四)자에 대한 일종의 터-부의식 때문에서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숫자가 다가올수록 왠지 모를 꺼림칙한 추측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출발 전, 막걸리라도 부어 '고수레' 라도 할 걸 하고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풍광에 눈을 줄 여유가 있을 리 만무였다. 그저 일직선 도로상의 상황에 미세한 변화라도 있나 하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애마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계기판의 연륜을 살펴보며, 숫자에 대한 가벼운 짓눌림이 내게 두려움과 불안감을 전해왔다. 그러나 이 또한 잠시였다. 어느덧 애마는 익숙한 거리를 지나며 목적지에 당도하고 있었다.
나는 가벼운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차를 주차시키고, 불안에서 채 벗어나지 아니한 모습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문득 며칠 전 퇴근길에 매립지 도로를 통과하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뉴스의 한 토막. 동충하초(冬蟲夏草)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필 그이야기가 왜 떠올랐을까. 그때 나는 자연과학에 의한 생태학의 연구 결과와, 뽕잎을 먹는 누에의 육신을 이용한 영약의 개발이라는 의약산업의 개가(凱歌)보다도, 뽕나무의 무성한 풀잎이 내게 주는 깊디깊은 의미를 떠올려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터널을 통과한 유년시절. 어느덧 나는 그 아득한 단초(端初)를 잔잔하게 오버랩 시키는 기억 저편의 아스라한 유년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삼십 년도 훨씬 넘은 어느 해 여름의 일이었다. 우리 집 주변은 온통 황토색이었다. 충청도 고읍(古邑)에 위치한 우리 집. 행여 비가 오는 날이면 함석을 때리는 소나기의 콩볶듯 하던 빗소리. 나는 골방의 창문을 열고 어두컴컴해지는 남녘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열 한 살 나이였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날 따라 몹시도 화가 나 계셨다. 어머니가 황급히 내 손목을 잡아채 밖으로 끌고 나가지만 않았던들, 그날 나는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을 게 뻔한 일이었다. 평소에 아버지는 좀처럼 화를 내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달랐다.
그 시절 어느 집인들 끼니 걱정을 않았으랴. 육십 년대의 궁벽한 촌마을 종가에서 분가한 것이 우리 집이었다. 가난은 우리 가족의 일상사였다. 아버지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흙벽돌을 찍는 기계를 한 대 들여다 집 앞 남새밭에 설치 하셨다. 그리고는 어머니와 함께 집 뒤에 있는 야산 기슭의 황토를 파내어 붉은 벽돌을 찍기 시작하셨다. 황토에 지푸라기를 섞어 물로 반죽하고 수동식 기계에 반죽된 황토를 퍼담아 다져 벽돌을 만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고된 노동이었는지를 어린 나이인 나도 알만 했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벽돌이 가끔씩 황소가 끄는 마차에 실려나갈 때면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흙벽돌을 하나씩 나르곤 했다. 그러나 여름하늘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혹여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면 삽시간에 수백 장의 벽돌을 뭉개 버리곤 했다. 일기예보가 있을 리 만무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아침나절 어머니가 내게 쥐어주신 공책 값이 문제였다. 천연색 그림의 동그란 딱지에 온통 마음을 팔고 있던 내게 그것은 참으로 기회였다. 나는 그날 그 돈으로 그토록 이나 갖고 싶어하던 딱지를 사고야 말았다. 검은 안경을 멋드러지게 쓴 맥아더 원수와 여러 사령관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열두 칸 기와집에 살고 있는 달수녀석이 달포 전부터 움켜쥐고 약을 올리던 그 딱지였다.
그 날 따라 소나기가 줄기차게 내렸다. 어머니는 비를 막을 심산으로 벽돌 위에 짚단을 덮었지만, 무심하기 짝이 없는 빗줄기는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을 몽땅 앗아가 버린 날이었다. 하필이면 왜 그때 어머니의 지친 시선이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딱지에 머물었을까? 아버지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잠시 후였다.
분노한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으면서도 딱지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어떻게 마련한 딱지인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훌쩍거리다가 분풀이하듯 손을 뿌리치고는 동구 밖 뽕나무밭으로 달려갔다.
동네사람들은 그곳을 사천사백 고랑이라고 불렀다. 두 길도 넘는 뽕나무 줄기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고, 무성한 이파리가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억수같이 비가 내려도 큰 이파리가 빗줄기를 가려줄 것만 같았다.
빗물에 젖은 딱지를 행여 찢어질까 두 손으로 감싸고 그루터기를 찾았다. 딱지를 보관하기 위한 수혈(樹穴)이라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녁 무렵에야 아득하게 들려오는 어머니의 찾는 소리에 뽕밭에서 나왔다. 벽해(碧海)와 같은 뽕나무밭을 나오며 나는 나뭇가지를 꽂아두어 표시를 하였다. 훗날에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딱지가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나름대로의 암중모색이었다.
칭얼거리는 동생을 끌어안고 아버지로부터 한 차례 호된 꾸중을 더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함석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치 내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루터기 속의 딱지가 더 이상은 젖지 않기를 밤새 빌면서 잠을 설쳐야 했다.
다음날 아침 아궁이에 솔가지를 태우다 말고, 어머니의 외침소리를 뒤로 한 채 숨겨놓은 딱지를 찾으러 뽕나무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밤새 내린 소나기는 뽕나무밭의 주변 흔적을 깡그리 없애 버린 뒤였다. 밭고랑에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긁히고 찔려 팔뚝과 종아리에는 흙과 피가 범벅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그런 나를 깨끗이 씻어주시며 어루만져 주셨다.
새 공책을 사들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석양 무렵까지 뽕밭을 헤매었다. 귀신이 들고 간 것이었을까? 아니면, 혹여 밭주인의 눈에라도 띈 것이었을까? 딱지의 종적은 묘연했다. 그날 하루 나는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는 골방 창틀에 매달려 희뿌연한 빗줄기의 촘촘한 장막을 체념어린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빛으로 씻겨나가는 벽돌의 잔해가 유난히 원망스러웠다. '이 세상에 있는 누에는 모두 오려무나 …. 소나기를 타고 저 뽕밭에 떨어져 뽕잎을 전부 갉아먹으려무나!' 나는 독백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쓰레기를 가득 실은 트럭 한 무리가 마치 쏘아놓는 화살처럼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회상에서 깨어났다.
사만사천사백사십사 킬로미터의 주행 기록은 이제 불혹을 넘기고 사십사세를 목전에 둔 내 나이와, 삼십이 년 전의 순백한 동심에 파문을 일으킨 딱지. 그리고 사천사백 밭고랑을 자랑하던 거대한 뽕밭의 전설을 연상시켰다. 문득 숫자가 갖는 묘한 일치.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각지를 전전해야했던 암울했던 세월, 그러나 이제는 어엿한 가장으로 변모한 자신의 모습을 대견스레 돌아본다.
그렇다. 암울했던 겨울. 인고의 몸짓으로 벌레가 되어 섭생하다가 마침내 화창한 여름날, 아름다운 풀잎으로 다시 피어나는 누에의 기묘한 일생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동충하초'라 했던가.
"그래. 동충하초말로 가장 숭고한 생명의 환원(還元)일지도 모르지! 그 여름날 뽕밭에 퍼붓던 장대비처럼 질퍽하게 세상을 향하여 소리 없이 외치는 시대의 절망이며, 또한 환희일 게야…"
나는 그렇게 주억거리고 있었다.
애마 프라이드가 육교로 올라서자, 내 시선은 어느덧 남녘을 향해 있었다. 가까이 인천제철의 높다란 굴뚝으로 점점이 흩어지는 연기가 마치 뽕잎을 먹는 누에의 형상으로 다가왔다. 나는 지난날 고단했던 기억이라도 뿌리치려는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동충하초, 그래 나도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1998 . 8 . 1)
'수필·산문·소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멩이 세 개 - 김광 (0) | 2014.06.02 |
---|---|
망둥이 - 서부길 (0) | 2014.06.02 |
은빛 매미의 눈망울 - 한기홍 (0) | 2014.06.02 |
두껍다리 - 한기홍 (0) | 2014.06.02 |
찔레꽃머리 - 한기홍 (0) | 2014.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