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공양 - 이경례 나무의 공양 / 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 이웃의 詩 2014.12.06
술 한 잔 - 정호승 술 한 잔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 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인생은 나.. 이웃의 詩 2014.12.06
아버지 - 황현미 아버지 황현미 넉넉하지 못해 두고 갈 것 별로 없고 지고 갈 것 더욱 없어 가벼워 좋긴 한데 미안하다는 말씀에 눈물 납니다 가볍다 못해 몸인지 깃털인지 어찌 그리 사셨는지요 당신의 분신은 이토록 윤기 흐르는데요 자식들 커갈수록 당신은 한없이 작아져도 들꽃처럼 웃던 아버지 그 .. 이웃의 詩 2014.12.06
농무農舞 - 신경림 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 이웃의 詩 2014.12.06
고추밭 - 안도현 고추밭 안도현 어머니의 고추밭에 나가면 연한 손에 매운 물든다 저리 가 있거라 나는 비탈진 황토밭 근방에서 맴맴 고추잠자리였다 어머니 어깨 위에 내리는 글썽이는 햇살이었다 아들 넷만 나란히 보기 좋게 키워내셨으니 진 무른 벌레 먹은 구멍 뚫린 고추 보고 누가 도현네 올 고추 .. 이웃의 詩 2014.12.06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 최문자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 최문자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헐어빠진 나무 대문들을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대문의 나뭇결은 숨을 그치고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늦은 밤 돌아와 보면 길고 좁은 골목 마지막 끝에 자기 그림자 꼭 껴안고 바.. 이웃의 詩 2014.12.06
달밤 - 기형도 달밤 / 기형도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봄이 가고. 우리는, 새벽마다 아스팔트 위에 도우도우새들이 쭈그려앉아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맨홀 뚜껑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새들은 엇갈려 짚는 다리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 이웃의 詩 2014.12.06
물 - 함민복 물 / 함민복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 태양을 걸 수도 있는 게지요 이웃의 詩 2014.12.06
귀로(歸路) / 이형기 귀로(歸路) / 이형기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 오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우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워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 이웃의 詩 2014.12.06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 이웃의 詩 2014.12.06